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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e Column

[최태호의 와인 한 잔] 먼 훗날

by 더센트 2025. 5. 26.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물이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종은 성공적으로 진화해 번성하고 어떤 종은 환경 적응에 실패해 사라진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1859년 저서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모든 생물은 신이 만들었다는 창조론을 믿었던 당시에는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하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다윈의 진화론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더불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대 생물학은 물론 철학, 사회학 등의 바탕이 되고 있다.

프랑스 루시옹지역의 주정강화와인.
생물의 진화에는 목적과 이유가 없다. 우연히 나타난 수많은 생명체 중 살아남은 것들은 번성하고 환경이 바뀌어 적응을 못한 것들은 도태된다. 이렇게 생태계는 우연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해 왔다. 생명의 이유? 자연은 그런 걸 굳이 따지지 않는다. 생존하면 그게 생명이다. 와인을 만드는 수많은 포도 품종들도 생존 경쟁을 벌인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좋은 와인을 만드는 포도를 골라내는 것이다. 실제로 와인 생산자들은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그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잘 적응하는 품종을 심거나 포도나무가 대를 거듭하는 동안 자연환경에 맞게 진화된 클론(형질이 같은 나무로부터 무성생식으로 생긴 변종)을 골라 심는다. 같은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들이 프랑스 미국 등 산지에 따라 와인의 스타일이 다른 이유이다.

마케팅은 소비자의 욕구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다. 특히 세분화 집단에 따른 소비 행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마케팅 패러다임의 변화는 크게 매스 마케팅에서 타깃마케팅, 개인화 마케팅 그리고 초개인화 마케팅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0년대부터 시작된 초개인화 마케팅은 소비자가 제공하는 정보만을 바탕으로 세분화된 집단을 타기팅하는 개인화마케팅과 달리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등 최첨단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의 구체적 행동 패턴에 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포함한다.

주변의 많은 것이 자연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인물이나 사물, 상황에 대해 한번 판단을 내리면 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첫인상이 주는 느낌이 강렬해서 한번 잘못된 믿음에 빠지면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근거가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실제로는 잊지 못했지만 잊었다고 말하는 반어법이 돋보이는 김소월의 시 ‘먼 후일’처럼 우리에게 먼 훗날이라는 시간은 현재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징적 탈출구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잊었다 말하는 아픔이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여기까지 오는 길은 참 길었다. 쉼 없이 오면서 가끔은 뒤 돌아가서 뭔가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걷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하는 줄만 알고 여기까지 왔다.

발효가 막 끝난 와인은 혼탁하고, 효모의 향, 산과 탄산가스가 있어서 풍미가 거칠다. 이런 어린 와인이 숙성되면 성분이 변화고 좋은 향미가 형성되는 것처럼 치열한 생존 경쟁의 시간을 버티어온 우리에게는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위안의 시간, 먼 훗날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디저트로 즐겨 먹는 티라미수는 ‘나를 들어 올리다’ ‘나를 응원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문득 외로움을 식혀줄 차가운 티라미수와 과일 향 가득한 프리울리의 소비뇽블랑 한잔의 매칭이 떠오르는 밤이다.

 

최태호 부산가톨릭대 와인전문가과정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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